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과달카날 전역 (문단 편집) == 전투 종료 이후 == 과달카날 전역에서 [[미군]]이 마지막 총공세를 벌이던 때, 뉴기니 전역에서도 연합군이 일본군의 진격을 격퇴(밀른만 전투, 부나-고나 전투)하여 일본군을 동부뉴기니 북쪽지역으로 몰아냈다. 유럽 전선에서는 [[토치 작전|북아프리카에서 연합군이 본격적인 반격에 나섰으며]], 독-소 전선에서는 [[스탈린그라드 전투#s-5|스탈린그라드에서 소련의 승리가 확정]]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전쟁의 전환점을 맞이했다고 판단한 연합국 수뇌부들은 [[카사블랑카 회담]]에서 추축국의 무조건 항복을 결의하게 된다. 이 회담에서 태평양 전선에 대한 논의도 있었다. 비록 기존의 유럽 우선 정책이 재확인 되긴 했으나, 태평양 전선도 중요성을 인정 받게 된다. 이 이후로 태평양 전선에서 미군을 위시한 연합군은 일본의 공세를 막는데서 그치지 않고 반격에 나설 수 있게 되었으며 그에 걸맞는 지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태평양 전선의 연합군에게 물자가 본격적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시점이 바로 이 과달카날 전역이 끝나던 시점이다. 과달카날과 뉴기니에서의 승리로 자신감을 얻은 연합군은 위와 같이 후방 지원까지 확정되자 본격적인 반격 작전을 준비하게 된다. 한편 작전에 투입되었던 해병들은 말라리아등 밀림에서 여러모로 고생했기에 재충전 의미로 호주에서 휴식기간을 거쳤다. 그렇게 과달카날 전역이 끝나기가 무섭게 남태평양의 일본군 거점인 라바울을 목표로 한 거대한 반격 작전인 수레바퀴 작전(Operation Cartwheel)이 수립되었으며, 1943년 전반기 동안 전력을 축적한 연합군은 1943년 6월말부터 솔로몬 제도와 동부뉴기니 일대에서 본격적인 반격에 나선다. 일본군은 과달카날에서 패배하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남서태평양 일대를 포기하지 않았다. 과달카날 철수를 결정하던 바로 그 때에, 솔로몬 제도와 동부 뉴기니의 요충지를 장악하여 연합군의 반격을 막고 여차하면 다시 공세에 나선다는 전략을 수립했다. 이에, 동남아 점령지를 배후에 둔 동부 뉴기니에는 육군 병력을 증원하고, 솔로몬 제도 중부지역에 비행장을 확보하기 시작한다. 과달카날에서 일본군이 철수한 이후에도 1943년 내내 동부 뉴기니와 솔로몬 제도를 둘러싸고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과달카날에서의 소모전은 일본군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혔다. 큰 피해를 입은 건 연합군도 마찬가지 였으나 상술한 바와 같이 연합군은 그 피해를 메우고도 남아서 일본군에 대해 점차적으로 전력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반면 이미 후방 지원의 한계에 달한 일본군은 피해 복구부터가 어려웠다. 특히 과달카날 전역에서 항공전력이 극심한 소모를 겪은 것이 치명적이었다. 항공전력의 손실과 약화는 단기적으로는 과달카날 전투 이후 동부 뉴기니와 솔로몬 제도에서 일본군의 행동에 큰 제약이 되었다. 일본군은 제공권 장악에 실패하여 남서태평양 해역에서 무리한 요충지 공략을 시도할 때마다 되려 피해를 입곤 했다. 대표적인 것이 뉴기니의 와우 공략전, [[비스마르크해 해전]], 이호 작전 등이 있고 그 와중에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도 미군의 항공공격으로 전사하고 만다. 더 장기적으로 봤을 때 과달카날 전투에서의 소모전은 일본군 항공전력 몰락의 가속화로 이어졌다. 과달카날 전투 기간인 1942년 8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6개월 간 일본 해군은 892대의 일선 항공기를 상실했다. 더 큰 문제는 조종사 및 항공승무원의 손실이었다. 일본군의 승무원 손실은 1,881명에 달했다. 이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이 입은 승무원 손실 121명[* 미드웨이에서 일본의 항공기 손실은 327대였다.]의 15배에 달하는 것이었다. 가뜩이나 일본군의 항공전력은 소수정예로 육성되었기 때문에 과달카날에서의 손실은 치명적이었다. 일본군의 항공전력 소모는 과달카날 전투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과달카날 전투 이후로도 1943년 내내 동부 뉴기니와 솔로몬 제도에서 계속된 공방전으로 일본군은 7,000대의 항공기를 손실했다. 1943년 후반 즈음에는 미국의 전시공업체제가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하며 일본은 미군의 본격적인 공세를 맞게 되는 시점이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항공전력은 그간 누적된 손실로 인해 이미 [[총체적 난국|전면적 붕괴 위기]]를 앞두고 있었다. 과달카날을 기점으로 미일간 항공전력에서의 격차는 항공기의 수량과 승무원의 기량 양쪽 모두에서 절망적인 수준까지 벌어졌다. 과달카날 전투로 [[명예 훈장]] 수여자가 5명 나왔다. 1사단장 밴더그리프, 에드슨 능선 전투(피의 능선 전투)의 에드슨 기습대대장과 바실론 하사, 1차 마타니카우 전투의 베일리 소령(사망), 2차 마타니카우 전투의 앤서니 카사멘토. ~~솔직히 작전의 신 [[츠지 마사노부]]에게도 줘야하는거 아닌가?~~ 이 전투후 과달카날이라는 글자와 남십자성이 들어간 사단 패치가 만들어져 장병들이 부착하게 된다. 장교들은 사방으로 분산되었는데 '과달카날 마피아'라고 불리며 잘나가게 되었다. 고참병들 역시 다른 해병사단들을 만들기 위해 전출가서 핵심 전력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